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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려진 의자 하나가 바꾼 오래된 아파트단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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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억의저편
댓글 0건 조회 32회 작성일 25-09-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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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종종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가구나 가전제품들이 버려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냉장고, 책상, 옷장 같은 큰 물건부터 오래된 전기밥솥이나 의자 같은 작은 것들까지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쓰레기로만 보이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동네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하죠. 오늘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버려진 의자 하나가 바꿔 놓은 작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 마주친 낡은 의자

몇 달 전, 아파트 단지 한쪽 화단 옆에 낡은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접이식 의자도 아니고, 꽤 오래 사용된 듯한 나무 원목 의자였습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다리가 조금 삐걱거리는 상태였지만, 누군가의 거실이나 서재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처음 봤을 땐 “아, 누가 버린 거구나. 곧 수거해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의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아무도 치우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방치된 것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어느 날 퇴근길에 보니, 누군가 그 의자에 잠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 의자가 그냥 버려진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자리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다

그 후로도 의자는 자리를 지켰고, 의자 위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침에 아이를 등원시키던 학부모들이 잠깐 앉아 수다를 떨기도 했고, 저녁에는 산책 나온 어르신들이 잠시 앉아 숨을 고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중학생 아이들이 편의점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웃는 모습도 봤습니다.

그 전까지 그 화단 옆 공간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의자 하나 덕분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 된 겁니다. 재미있는 건, 그 주변 풍경까지도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의자가 놓인 뒤부터는 사람들이 그 옆에 잠시 앉아 담소를 나누다 보니, 그 길을 지나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의자가 준 여유

저 역시 어느 날 퇴근길에 의자에 앉아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라면 곧장 집으로 향했을 텐데, 그날은 괜히 의자가 불러 앉아 본 거죠. 생각보다 앉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한참 동안 노을빛에 물든 아파트 단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괜스레 마음이 차분해지고, 하루 동안 쌓였던 긴장도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일부러라도 그 의자에 앉는 날이 생겼습니다. 짧게는 5분, 길게는 20분 정도. 앉아 있으면 옆을 지나던 이웃이 “퇴근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서로 얼굴만 스쳐 갔을 사람들이었는데, 의자라는 매개체 하나 덕분에 소소한 대화가 시작된 겁니다.

의자에 담긴 기억들

시간이 흐르면서 의자는 동네의 작은 명물이 되어 갔습니다. 아이들은 그 의자를 ‘우리 의자’라고 불렀고, 어르신들은 “저기 앉으면 시간이 참 잘 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의자를 볼 때마다 ‘버려진 물건’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의자는 점점 더 낡아갔습니다. 비에 젖기도 했고, 햇볕에 바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 의자를 치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일부러 청소를 해 주었는지, 어느 날 보니 앉는 부분에 새 천이 덧대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였죠.

버려짐에서 쉼터로

처음에는 ‘버려진 물건’으로 여겨졌던 의자가, 이제는 아파트 단지의 작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짐이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잠깐의 여유를 선물하는 공간으로 바뀐 겁니다. 저는 이 변화를 보면서 ‘물건의 쓰임’이라는 게 꼭 정해진 답이 있는 건 아니구나, 그리고 ‘버려짐’이 항상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늘 새로운 것, 반짝이는 것을 쫒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 버린 작은 물건 하나가 동네 풍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했습니다. 의자 하나가 준 변화는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만들었으며,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의자가 없었다면 몰랐을 소중한 풍경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의자를 흘깃 바라보며 속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도 수고했어. 덕분에 동네가 조금 더 따뜻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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